그때 그 사고 2. 냉동창고 화재사고
“본 내용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실제 산업재해 사건을 모티브로 허구적으로 구성한 글입니다.<br />이 글은 산업재해는 회사나 관리자, 근로자 등이 안전과 관련한 원칙을 준수하면 사고를 예방하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다 모였나? 아침들 먹었소?”
북방 말투 역력한 인사말이 허공을 갈랐다. 그를 신호로 잠시 왁자지껄한 연변 사투리가 잠시 주변을 장악했다.
“얼굴이 어찌 이러니. 간밤에 술 마이 먹었구만.”
“아이오 무슨 술을 먹소. 피곤해서 집에 가자마자 자빠져 버리는데.”
“젊은 놈이 뭐 그리 허약하나. 내가 너 만할 때는 며칠 밤을 새도 까딱도 안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지나치다 한 번쯤 돌아볼 정도로 그들은 명랑하게 소란스러웠다. 도합 일곱 명의 중국 동포들. 나이 예순의 고영모(가명)씨와 조카들, 그리고 그 매형, 고종사촌들이었다. 그들은 2000년에 입국해서 한국 국적을 취득한 조선족 자매의 친인척들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함께 들어와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환갑이 머지않은 이부터 스물여섯의 젊은이까지 나이는 다양했지만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힘든 일이든 위험한 현장이든 서슴지 않고 뛰어드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들은 ‘요령성의 7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요령성의 7인’의 그날 일터는 어느 냉동 창고의 마지막 공사 현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서툰 한국말로 인사하는 외국인 청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이반이었다. 요령성의 7인과는 구면이었다.
“이반! 돈 많이 모았나 이제? 이번 일 끝나면 고향 가서 결혼한다고 했지?”
“돈 더 모아야 돼요. 우리 색시 욕심 많아요.”
“하하하. 중국이나 한국이나 우즈벡이나 여자들은 다 그렇다니까.”
그들 뿐 아니라 새벽에 집결하기 시작한 일꾼들 대부분 낯이 익었다. 새벽 인력 시장에서 일 배치 받아온 일용직 노동자들이었으니 적어도 몇 번은 삽을 섞고 함께 자갈을 날랐던 사람들이었다. 십장 노릇을 하는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 자 빨리 끝내고 점심 먹자고.”
냉동 창고는 며칠 뒤 개장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골격과 내부 구조는 완성 단계였고 에어컨 냉매 주입 작업과 전기 설비 작업 등 막바지 공정이 주된 일거리였다. 곳곳에서 용접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이내 용접 불꽃이 사방에서 튀어 올랐다.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하1층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저마다의 작업에 몰두했다. 시끄럽지만 평온했고 부산했지만 질서가 있었다. 숙련된 근로자들의 손길은 각이 질 듯 정확했고 작업은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어디선가 다급한 비명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이거 뭐야!”
쪼그려 앉아 용접에 한창이던 한 근로자가 용접용 보안경을 벗어 던지며 다급히 일어났다. 사람들이 비명 쪽을 향해 돌아섰을 때 본 것은 벽을 타고 오르는 불길이었다. 용접기 불꽃이 벽에 옮겨 붙은 것이었다. 언뜻 보면 큰 불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삽시간에 벽을 타고 올라 지붕을 덮고 다시 불똥을 튀겨 이리저리 옮겨 붙는, 흡사 살아 있는 듯 한 불길의 광란에 경악한다.
작업장 내부와 벽면 모두는 우레탄으로 도배돼 있었다. 단열이 뛰어나 냉동 창고에는 필수적으로 쓰이는 자재였다. 하지만 이 우레탄 발포 과정에서 발생한 유증기가 창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근로자들은 몰랐다. 유증기는 사방에서 맹렬하게 튀어 오른 용접 불씨들을 만나 미세한 불폭탄으로 우레탄 위에 떨어졌고, 화재에 취약한 이 자재는 글자 그대로 바짝 마른 불쏘시개로 불타올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곳 저곳에서 펑! 하는 불길한 굉음과 찢어지는 비명이 창고 안을 울렸다.
*유사 사고 이미지
“나가!”
“콰이 파오!(중국어로 빨리 도망가)”
“빠마기체 미냐“ (사람 살려- 러시아 어)
여러 나라 언어로 외침이 불길 치솟은 창고 안을 갈랐다. 기계실에서 시작된 불길은 삽시간에 거의 모든 현장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불길이 토해 낸 검은 연기가 사람들을 덮쳤다. 우레탄은 연소할 때 일산화탄소, 벤젠, 시안화수소 등 치명적인 독가스들을 대량 발산한다.
층은 높지 않지만 칸막이가 겹겹이 쳐져 미로와 같았고, 화재로 전기가 끊겨 나가자 창고 안은 흑암과 초열이 반반 섞인 지옥으로 화해 버렸다. 발포 작업 중이던 우레탄에 섞여 있던 시너와 냉매가 연쇄 폭발을 일으키면서 불길은 필사적인 뜀박질보다도 더 빠르게 사람들을 둘러쌌고 그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요령성의 7인 역시 어둠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그 목소리들은 하나 둘 불길과 연기 속에 아득히 파묻혔다. 비상구로 가라는 소리가 절망적으로 어둠을 갈랐지만 비상구를 제대로 찾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몸부림치며 비상구를 찾다가 머지않아 뜨거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고용노동부령 제77호) 제17조에 따르면 사업주는 위험 물질을 제조 취급하는 작업장과 그 작업장이 있는 건축물에 출입구 외에 안전한 장소로 대피할 수 있는 비상구를 50미터 이내에 설치하도록 돼 있으나, 운동장만한 넓이의 냉동 창고 공사 현장에서 비상구는 단 하나였다. 법적으로 규정된 경보용 설비나 기구도 깡그리 작동하지 않았다. 스프링클러의 경우 동파방지를 위해, 방화문은 오작동 방지를 위해 자동 작동 아닌 수동 작동으로 전환한 상태였고 화재 시 완전무결한 무용지물이 되었던 것이다.
창고 안의 불길과 유독가스의 기세 때문에 소방관들은 화재 발생 근 4시간 만에야 현장에 진입했고 그나마 건물 전체의 붕괴 위협 때문에 적극적인 수색 작업을 벌이지 못했다. 마지막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화재 발생으로부터 무려 13시간이 지나서였다. 이 사고로 40명이 숨졌다. 그 가운데 12명이 중국 동포들이었고 물론 요령성의 7인도 포함돼 있었다. 그들의 코리언 드림은 화마(火魔)의 광풍 속에서 속절없이 타들어가고 말았다.
“내가 잘못했소. 내가 한국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한국으로 귀화하여 일가친척 모두를 불러들였던 여인은 통곡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죄 여자들 뿐이오. 우리는 어찌 살라 하고 이렇게들 갔소.”
그들은 자신들의 남편과 형제의 시신을 확인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강력한 불길 속에 시신 훼손이 심하게 진행돼 DNA 판독을 통해서야 자신의 가족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하루 전 아침에도 아내의 손을 잡고 식당 일 잘하라, 우리 어서 벌어 고향 돌아가 남 보라는 듯이 살자 꼭 잡아 주던 남편의 손도, 나는 한국에서 살 것이라며 서울말을 혀에 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조카의 몸도 시커멓게 탄 뼛조각으로만 남았다.
*유사 사고 이미지
완공 기일을 맞춰야 한다는 다급함은 무리한 작업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의 안전을 무시한 ‘속도전’으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혹시나?’ 하는 신중함은 ‘설마 무슨 일 있겠어’ 하는 무모함 앞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그 댓가는 40명의 소중한 목숨이었다. 또한 사업주 본인에게도 법적인 책임 외에 생각지 못한 피해가 돌아갔다. 빠른 완공을 위해 안전장치를 해제한 것은 준공 검사 이후의 일이었던 바, 이를 보험사에 통고하지 않은 것이 중대 과실로 인정돼 당연히 받는다 생각했던 보험금조차 받지 못했던 것이다.
공사에 방해되니 잠깐만 잠가 두자고 스프링클러에 손을 대던 순간을, 툭하면 오작동이 일어나니 딱 하루만 방화문을 수동 모드로 바꾸려던 손길을 사업주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초도 안되는 손가락 놀림이 자신의 반평생과 40명의 한평생을 잿더미로 만든 기억이 척추에 박힌 창날처럼 그를 따라다닐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