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비 작업 시 방심이 부른 안전사고
나의 오른쪽 다리는 정상이 아니다. 무릎과 발 사이 뼈가 구부러져 있다. 아무리 수술을 여러 차례 해도 더 이상 펴지지 않는다. 영광의 상처로 생각하고 생활한다. 방심하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더 큰 화를 당하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다. 내가 사고를 당한 것은 97년 5월 초였다. 서울에서 살다가 양평의 한적한 시골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모내기를 위해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하는 시기였다.
나는 중장비 불도저를 운전하는 중장비 기사였다. 경운기나 트랙터로 고르지 못하는 습지대나 돌이 박힌 논은 작업이 용이하여 많이 사용하는 시기였다. 전화 요청이 오면 운반차로 싣고 가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남양주 조안면 부근에서 작업요청이 왔다. 운반차를 수배하여 싣고서 남양주로 달렸다. 부슬비가 내리더니 시간이 갈수록 세차게 내렸다. 어차피 물이 있는 논을 고르는 것이니 비가와도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현장으로 달렸다. 작업할 논 옆에 하차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운반차 기사가 하차 장소가 불안전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가서 안전한 장소를 찾아 하차를 하자고 하였다
“내 장비 운전 경력이 30년이요 그냥 내립시다” “조심하세요. 고임돌을 잘 놓고 내립시다”
운반차 기사의 충고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어서 빨리 하차를 하여 논을 고르고 다른 현장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였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했는데 일거리가 있을 때 많은 작업을 하여 돈을 벌고 싶었다.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불도저의 시동을 걸고 후진 기어를 넣고 클러치를 떼는 순간 장비가 미끄러져 내리더니 급기야 옆으로 넘어가 버렸다. 순간 나는 운전석에서 떨어져 운반차의 적재함 밑에 오른쪽 다리가 눌려 버리고 말았다. 비는 세차게 쏟아지고 천둥소리는 하늘을 가르는 듯 요란한데 육중한 불도저는 옆으로 쓸어져 굉음을 내 품고 있었다. 운반차는 옆으로 넘어가 있고 그 옆에 내 오른쪽 다리가 눌려있었다.내 정신은 가물거리고 있었다 “기사님 먼저 장비 엔진을 정지시키고 크레인을 불러요. 나를 구해 주세요!”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내 몸은 온통 하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아내가 보였다. “장비와 운반차는 어찌 되었소?” “지금 그것이 중요해요? 다행히 오른쪽 다리뼈만 부러졌대요. 밑에 흙이 질어서 이정도지 돌이라도 있었으면 큰일 났대요!”
사고의 후유증은 대단했다. 크레인 출동비, 운반차 수리비, 장비 수리비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고 일일이 사람을 사서 해결하려니 비용도 많이 들고 답답했다. 근 두달을 누워있다 보니 세월은 저만큼 가버렸고 일할 시기도 놓쳐 버렸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가 버렸다는 교통사고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조금만 신중하게 움직였다면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다. 비조차 내리는데 경사진 도로에서 하차를 감행한 것이 사고 원인이었다. 30년간 조그만 사고도 당하지 않았는데 경험과 기술만 믿고 서둔 까닭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 몸에 묶고 사용할 수 없는 법인데 지극히 방심한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잠시 잊은 것이다.
불도저 운전 경력 30년이면 눈을 감아도 조작이 가능하다. 아무리 넓은 운동장이나 논바닥이라도 기울지 않게 수평을 잡는다. 골프장에 라운드까지 호미로 밭이랑을 고르듯 작업을 할 수 있다. 사고는 뜻하지 않는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작업을 하고 많은 수입을 올리려 했고 조급증이 안전을 도외시 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 날 사고 이후 나는 돌다리도 두들기는 습관이 생활화되었다. 지금도 가끔 중장비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모두 조급증과 방심이 원인이다. 사고를 체험하면 그 때는 이미 늦다. 나처럼 몸에 상처가 남거나 더한 불행으로 가족과 사회에 부담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모든 근로자가 작업에 임할 때는 서두르거나 방심하지 말고 안전 수칙을 잘 지켜 밝은 가정과 사회를 영위해야 할 것이라 믿으며 글을 맺는다.